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 Claude Debussy
Debussy: Piano Works

전주곡 (드뷔시)
-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의 프렐류드(Préludes)는 피아노 독주를 위한 24곡으로, 각각 12개의 전주곡으로 구성된 두 권의 책으로 나뉩니다. 쇼팽의 Op. 28 전주곡이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잘 단련된 클라비어'의 전주곡과 같은 이전 시대의 전주곡 모음집과 달리 드뷔시의 전주곡은 엄격한 음조 중심 패턴을 따르지 않습니다. 각 책은 몇 달 만에 쓰여졌는데, 드뷔시에게는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였다. 제1권은 1909년 12월부터 1910년 2월 사이에 쓰여졌고, 제2권은 1911년과 1912년 사이에 쓰여졌다.
성능
1911년 5월 3일, 피아니스트 제인 모르티에(Jane Mortier)는 파리의 살레 플레옐(Salle Pleyel)에서 첫 번째 전주곡을 초연했다. [1] 레오폴드 고도프스키의 제자인 독일계 영국 피아니스트 월터 모스 럼멜은 1913년 런던에서 두 번째 책을 초연했다. [1]
드뷔시와 전주곡의 초기 연주를 한 다른 피아니스트들(리카르도 비녜스 포함)은 서너 명씩 그룹으로 연주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인기 있는 접근 방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연주자는 자신이 가장 친밀감이 강한 전주곡 또는 자신의 특별한 재능이 가장 적합한 전주곡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전주곡 사이에는 강한 음조 관계가 있는데, 이는 출판된 순서가 임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2] 예를 들어, 첫 번째 책의 처음 세 개의 전주곡(Danseuses de Delphes, Voiles 및 Le Vent dans la Plaine)은 B♭의 키를 계속 참조합니다. [2] 이러한 참조는 왔다가 사라지지만, 이러한 전주곡 사이에 강한 유동성과 연결감을 만들어냅니다.
전주곡의 순서는 명령형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예를 들어 쇼팽의 전주곡과 같이). 몇몇 피아니스트들은 이 곡들을 순서에 맞지 않게 연주했다. 그리고 이반 일리치(Ivan Ilić)의 적어도 한 번의 녹음은 순서를 완전히 바꾼다.
두 책의 첫 번째 완전한 녹음은 193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피아니스트 아돌프 할리스에 의해 영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4]
제목
원본에서 드뷔시는 각 작품의 끝에 제목을 배치하여 [5] 연주자가 사전에 제목의 영향을 받지 않고 각 전주곡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Les sons et les parfums tournes dans l'air du soir"는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시 Harmonie du soir ("저녁의 조화")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Fairies are exquisite dancers"는 드뷔시의 딸이 선물로 받은 JM Barrie의 책 Peter Pan in Kensington Gardens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의 제목은 시적으로 모호하다: 첫 번째 책의 두 번째 서문인 Voiles의 정확한 의미는 확인할 수 없다. 프랑스어에서 voiles는 "베일" 또는 "돛"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레이션과 각색
다양한 전주곡으로 수많은 관현악이 만들어졌는데, 대부분 La fille aux cheveux de lin과 La cathédrale engloutie입니다. 24개의 전주곡 전주곡의 관현악 편곡에는 파비카 그보즈디치, 페터 브라이너, 뤽 브루에이스, 한스 헨케만스, 콜린 매튜스의 버전이 포함되어 있다. [8][9][10][11] 숀 오스본과 지휘자 노암 주르가 첫 번째 책을 편곡했다.
일부 Préludes는 Untitled Goose Game의 역동적인 사운드트랙을 구성하기 위해 각색되었습니다.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I. Danseuses de Delphes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II. Voiles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III. Le vent dans la plaine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IV. Les sons et les parfums tournent dans l'air du soir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V. Les collines d'Anacapri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VI. Des pas sur la neige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VII. Ce qu'a vu le vent d'ouest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VIII. La fille aux cheveux de lin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IX. La sérénade interrompue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X. La cathédrale engloutie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XI. La danse de Puck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XII. Minstrels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Arturo Benedetti-Michelangeli (5 January 1920 - 12 June 1995)
이탈리아 태생의 피아니스트.
20세기를 살았던 음악가 중 대다수는 ‘천재’의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클라라 하스킬은 찰리 채플린이 인정했던 천재였고, 토스카니니는 200여 곡이 넘는 곡의 악보를 완벽하게 암기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단 하룻밤이면 암보가 끝났다고 전해지는 발터 기제킹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암보를 했던 연주자로 꼽히고 았다.
그 외에도…일일이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듯 하다.
그리고 20세기 클래식 음악계에서 또 한 명의 천재 피아니스트를 간과해서는 안될것이다.
너무도 신경질적이었고 너무도 완벽함만을 추구했던, 그 이름 바로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 Michelangeli)이다.
페루치오 부조니 이래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손꼽히는 미켈란젤리는 1920년 1월 5일,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의 옛도시 브레시아(Brescia)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유고슬라비아인이고, 부친은 변호사였으나 피아노 교사의 자격을 가졌으며, 미켈란젤리도 4세 무렵부터 아버지로 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브레시아 벤투리 음악원에서 배웠다.
처음에는 바이올린과 오르간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가 피아노로 전공을 바꾸었다.
10세 때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하여, 3년에 걸쳐 조반니 안포시(Giovanni Anfossi, 1864–1946)에게 피아노를 사사했다.
이때서야 비로소 정규 음악교육을 빋을 수 있었으며, 14세에 무척 빨리 졸업을 하였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미켈란젤리는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힘든 예술가의 길을 걷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는 없었다.
이즈음 아버지로부터 의학을 공부하라는 권유를 받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학공부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38년 5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국제 콩쿨(the Ysaÿe International Festival. 훗날 퀸 엘리자베스 콩쿨이 된다)'에 출전, 7위에 입상하면서 부터이다.
당시 1위가 에밀 길렐스(Emil Gilels, 1916-1985), 2위가 모우라 림파니(Moura Lympany, 1916-2005)였으며, 이때 심사위원 중에 폴란드의 거장 아르투르 루빈슈타인(Artur Rubinstein, 1887-1982)이 있었다.
루빈슈타인에 따르면 미켈란젤리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연주를 들려줬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기교는 완벽에 가까웠다고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39년, 19세의 나이로 제 1 회 '제네바 국제콩쿠르(the Geneva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에 참가하여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여 우승하였으며, 이 때 심사원이던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 1877-1962)가 그 뛰어난 연주를 '새로운 리스트의 탄생' 이라고 격찬한 것은 지금도 유명하다.
바로 제네바 콩쿨에서 1위를 함으로서 미켈란젤리는 자신의 인생을 음악에 바치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곧 제 2차 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활동은 이탈리아와 독일에 제한되어, 미켈란젤리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퍼진 것은 전후인 46년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에 연주 여행하여 센세이셔널한 성공을 거두면서부터였다.
진정한 테크니션이라 불릴 만한 미켈란젤리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946년부터는 세계 각지를 공연하며 자신의 이름을 더욱 널리 알렸다.
그러나 약 10년 후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한때 연주활동에서 떠나, 보르짜노에 틀어박혀 교사로있는 한편, 시골 사람과 같은 생활을 계속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59년에 다시 연주 활동을 시작하여 유럽은 물론 미국에도 연주 여행하여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또 교육에도 매우 열성이어서, 볼로냐, 베네치아, 토리노 등의 각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고, 개인적으로도 많은 젊은 피아니스트를 육성하여 위대한 교사로서도 알려져 있다.
또 1965년부터는 출생지인 브레시아에서 그의 이름을 붙인 피아노 음악제가 열리고 있다.
1950년대 30대에 접어든 미켈란젤리는 병환이 잦아 한때 복귀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도 했으나, 1955년 '쇼팽 콩쿠르'의 심사 위원 및 공식 피아니스트로 선정되며 미켈란젤리는 부활하였다.
이후 그는 세계 각지에서 콘서트를 열었고, 그 압도적인 테크닉과 비교할 수없는 아름다운 피아노의 음색으로 순식간에 명성을 확립했다.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도 배출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두 명이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 1942- )와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 1941- )로 모두 '쇼팽 콩쿠르' 우승자이다.
미켈란젤리는 기분이 나지 않으면 가르치지 않았고, 또 제자로 삼으면 몇 년이라도 무료로 가르치고 생활의 뒷바라지도 해줬다고 한다.
미켈란젤리는 공연 취소로도 악명이 높았으며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취소하곤 했는데, 1년에 실제로 열린 연주회가 열 번도 안 되는 해도 있었다 한다.
그럴수록 희소가치는 더욱 높아져서 미켈란젤리의 무대는 전설이 되어갔다.
그는 녹음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다행히 1970년대 도이치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 레이블에서 쇼팽, 드뷔시, 베토벤, 모차르트 <협주곡> 실황 등을 발표했다.
1988년, 미켈란젤리는 연주회 도중 심장 마비로 쓰러지졌고, 이듬해 1989년 복귀했지만 병의 후유증 때문인지 완벽한 연주에서 좀 변해서 느긋한 연주 스타일로 변모했다.
미켈란젤리는 악기 선택에 까다로웠다.
피아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예정됐던 프로그램을 모두 연주하지 않는다든지, 나머지 투어를 취소해버리곤 했다.
악기의 상태, 무대의 습도에도 예민하고 까다롭게 반응했다.
이러한 예민하고 까다로운 체로 걸러 미켈란젤리가 만들어 내는 음색과 소리는 투명하고 아름답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늘어서 떨리는 듯도 한 피아니시모에서부터 압도적인 포르티시모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진폭의 표현을 구사하였다.
그 하나하나는 감각적으로 연마된 세련된 면모를 보여준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와 달리 건반의 상단 잡음, 즉 손가락이 건반에 부딪칠 때 나오는 충돌음을 최대한 억제해서 내는 것이 미켈란젤리 특유의 피아니즘으로 알려져 있다.
템포나 아고긱(Agogic: 템포에 미묘한 변화를 주는 주법)도 그의 특징이었지만, 이렇게 손톱 소리 안 나는 연주는 과거 선배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페루치오 부조니(Ferruccio Busoni, 1866-1924)와 연결되는 점이다.
미켈란젤리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열네 살 때 졸업시험을 보고 학위를 받을 때 연주한 곡이 브람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었다.
고난도 작품을 청소년기에 장기로 삼았다.
위에 언급한 공연 취소에 대해 본인이 해명한 부분도 있는데, 미켈란젤리 연주료가 보통 피아니스트보다 비쌌다.
돈을 많이 받고 연주하는데, 부족한 연주를 해버리면 관객들에게 미안해서 안 된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는 표면적 이유였을 뿐이고 팔 부상으로 컨디션이 자주 저하됐기 때문이란 분석이 있다.
최전성기의 미켈란젤리는 무서우리만큼 실수 없는 완벽한 연주로 유명했으며, 조율사도 항상 동행했다.
도이치그라모폰의 유명한 쇼팽 녹음은 음반 한 장 녹음을 3시간 만에 끝냈는데, 그만큼 실수 없는 연주를 했다는 얘기다.
연주만 3시간이지 준비 과정은 오래 걸렸으며, 피아노가 만족할 만한 상태가 될 때까지 편집증에 가까울 만큼 집착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 만큼 완벽한 연주를 위한 준비는 그야말로 철저했던 미켈란젤리였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리는 연주를 위한 컨디션 만들기 위한 집착도 유명하지만 초인적인 감각의 소유자였다.
이런 일이 있었다.
미켈란젤리가 피아노를 치다가 건반 하나가 이상하다고 계속 주장했으나, 조율사는 이상을 찾지 못했다.
이에 미켈란젤리는 피아노를 완전히 분해해서 검사한 결과, 그 건반에만 있는 작은 기구가 거꾸로 설치돼 있었다고 한다.
좌우가 98퍼센트 정도 대칭인 기구였는데, 거꾸로 설치해도 아무도 모르는 것을 미켈란젤리가 잡아냈다는 얘기다.
음반으로 전곡이 남아있지 않지만 연주회에서 서른 두 곡의 베토벤 <피아노소나타>를 연주했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리는 <협주곡>을 할 때 오케스트라 연주자들과도 직접 소통을 하면서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은 녹음도 훌륭하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베토벤 협주곡 1번>, <3번>, <5번 "황제">를 녹음했다.
이게 원래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예정됐었던 녹음이었다 한다.
클라이버는 함부르크에서 미켈란젤리와 <5번 "황제">를 공연하고 베를린에서 녹음을 시작했는데, 악보에 표시된 수많은 지시들을 보고 미켈란젤리가 그 해석에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 표시는 피아니스트가 아닌 악단원들한테 지시하는 사항이었으며, 의욕을 잃은 클라이버는 이 녹음을 접었다.
미켈란젤리가 조율을 못한 채 연주한 날도 있었다.
카네기홀 공연 당일, 미켈란젤리는 공연시간이 다 됐는데도 리허설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날은 특히 피아노에 줄을 갈아맸기 때문에 조율이 반드시 필요했었다.
조율사가 30분만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는데도 “나는 연습해야 한다”고 피아노에만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다음날 신문 리뷰에는 “피아노 상태가 엉망이었다”고 나왔다.
그토록 까다로운 미켈란젤리도 집에서는 연습에 푹 빠져 조율을 하지 않은채로 연주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미켈란젤리의 레퍼토리 폭은 좁은 편이었으며, 새로운 곡을 레퍼토리에 추가할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마디 동기만 계속 연습하곤 했다고 한다.
그가 가르친 제자들에 따르면 미켈란젤리가 자신들에게 가르친 곡들은 전곡을 모두 연주해 보였다고 한다.
즉, 완전히 마스터한 곡들만 제자들에게 가르쳤단 얘기다.
미켈란젤리는 지휘자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칭찬했던 몇 안 되는 연주자 중 하나였다.
첼리비다케는 독설가로 유명했다.
카라얀을 ...“유능한 비즈니스맨이거나 아니면 귀가 안 들리는 인간”...이라고 했으며, 리카르도 무티는 ...“재능은 있으나 지나치게 무식”...하다고 깎아 내렸다.
그리고 아바도에게는 ...“아주 무능한 사나이다.
3주 동안 굶고도 견딜 수 있지만 3시간 계속하여 아바도의 연주를 들으면 심근경색이 생긴다”...고도 했다.
칼 뵘은 ...“감자 포대”...이고
토스카니니는 ...“완벽한 음표공장”....이며
번스타인은 ...“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무시해 버렸다.
그런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거의 유일한 "천재"라고 칭찬했던 존재가 바로 미켈란젤리였다.
개성적인 두 사람의 앙상블이 좋아 각지에서 공연을 반복했다.
1980년 일본에 피아노를 반입하다가 압수당한 뒤에 적대감을 느꼈던 미켈란젤리는 협연 때 뮌헨 필의 일본인 단원 세 명을 빼달라고 요구했다.
첼리비다케는 이 제의를 거절했고 둘 사이는 멀어졌다.
미켈란젤리는 역시 비슷하게 까탈스런 글렌 굴드에게 동질감을 느꼈다고 한다.
카레이서답게 페라리와 벤츠 등 차를 과속으로 몬 것도 유명하다.
보통 180킬로미터, 밟을 때는 260킬로미터로 달리며 죽음과의 경계선이 희박해진다고 느껴질 때까지 달렸다고 한다.
아무튼 미켈란젤리는 현대 피아노 미학의 극치로 평가받는다.
베토벤에서 잘 연마된 표현력과 그 내적 긴장의 지속력이라든지 드뷔시 연주에서 음 색채의 아름다움과 음의 시라고 해도 좋을 정교하고, 판타스틱한 세계 등은 놀랍다.
드뷔시의 피아노에 몰입하기 힘들었다면 미켈란젤리를 들어보라.
조금씩 문이 열리는 걸 느끼게 된다.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 Claude Debussy
Debussy: Piano Works

전주곡 (드뷔시)
-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의 프렐류드(Préludes)는 피아노 독주를 위한 24곡으로, 각각 12개의 전주곡으로 구성된 두 권의 책으로 나뉩니다. 쇼팽의 Op. 28 전주곡이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잘 단련된 클라비어'의 전주곡과 같은 이전 시대의 전주곡 모음집과 달리 드뷔시의 전주곡은 엄격한 음조 중심 패턴을 따르지 않습니다. 각 책은 몇 달 만에 쓰여졌는데, 드뷔시에게는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였다. 제1권은 1909년 12월부터 1910년 2월 사이에 쓰여졌고, 제2권은 1911년과 1912년 사이에 쓰여졌다.
성능
1911년 5월 3일, 피아니스트 제인 모르티에(Jane Mortier)는 파리의 살레 플레옐(Salle Pleyel)에서 첫 번째 전주곡을 초연했다. [1] 레오폴드 고도프스키의 제자인 독일계 영국 피아니스트 월터 모스 럼멜은 1913년 런던에서 두 번째 책을 초연했다. [1]
드뷔시와 전주곡의 초기 연주를 한 다른 피아니스트들(리카르도 비녜스 포함)은 서너 명씩 그룹으로 연주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인기 있는 접근 방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연주자는 자신이 가장 친밀감이 강한 전주곡 또는 자신의 특별한 재능이 가장 적합한 전주곡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전주곡 사이에는 강한 음조 관계가 있는데, 이는 출판된 순서가 임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2] 예를 들어, 첫 번째 책의 처음 세 개의 전주곡(Danseuses de Delphes, Voiles 및 Le Vent dans la Plaine)은 B♭의 키를 계속 참조합니다. [2] 이러한 참조는 왔다가 사라지지만, 이러한 전주곡 사이에 강한 유동성과 연결감을 만들어냅니다.
전주곡의 순서는 명령형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예를 들어 쇼팽의 전주곡과 같이). 몇몇 피아니스트들은 이 곡들을 순서에 맞지 않게 연주했다. 그리고 이반 일리치(Ivan Ilić)의 적어도 한 번의 녹음은 순서를 완전히 바꾼다.
두 책의 첫 번째 완전한 녹음은 193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피아니스트 아돌프 할리스에 의해 영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4]
제목
원본에서 드뷔시는 각 작품의 끝에 제목을 배치하여 [5] 연주자가 사전에 제목의 영향을 받지 않고 각 전주곡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Les sons et les parfums tournes dans l'air du soir"는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시 Harmonie du soir ("저녁의 조화")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Fairies are exquisite dancers"는 드뷔시의 딸이 선물로 받은 JM Barrie의 책 Peter Pan in Kensington Gardens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의 제목은 시적으로 모호하다: 첫 번째 책의 두 번째 서문인 Voiles의 정확한 의미는 확인할 수 없다. 프랑스어에서 voiles는 "베일" 또는 "돛"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레이션과 각색
다양한 전주곡으로 수많은 관현악이 만들어졌는데, 대부분 La fille aux cheveux de lin과 La cathédrale engloutie입니다. 24개의 전주곡 전주곡의 관현악 편곡에는 파비카 그보즈디치, 페터 브라이너, 뤽 브루에이스, 한스 헨케만스, 콜린 매튜스의 버전이 포함되어 있다. [8][9][10][11] 숀 오스본과 지휘자 노암 주르가 첫 번째 책을 편곡했다.
일부 Préludes는 Untitled Goose Game의 역동적인 사운드트랙을 구성하기 위해 각색되었습니다.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I. Danseuses de Delphes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II. Voiles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III. Le vent dans la plaine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IV. Les sons et les parfums tournent dans l'air du soir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V. Les collines d'Anacapri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VI. Des pas sur la neige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VII. Ce qu'a vu le vent d'ouest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VIII. La fille aux cheveux de lin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IX. La sérénade interrompue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X. La cathédrale engloutie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XI. La danse de Puck
Debussy: Préludes / Book 1, L. 117: XII. Minstrels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Arturo Benedetti-Michelangeli (5 January 1920 - 12 June 1995)
이탈리아 태생의 피아니스트.
20세기를 살았던 음악가 중 대다수는 ‘천재’의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클라라 하스킬은 찰리 채플린이 인정했던 천재였고, 토스카니니는 200여 곡이 넘는 곡의 악보를 완벽하게 암기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단 하룻밤이면 암보가 끝났다고 전해지는 발터 기제킹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암보를 했던 연주자로 꼽히고 았다.
그 외에도…일일이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듯 하다.
그리고 20세기 클래식 음악계에서 또 한 명의 천재 피아니스트를 간과해서는 안될것이다.
너무도 신경질적이었고 너무도 완벽함만을 추구했던, 그 이름 바로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 Michelangeli)이다.
페루치오 부조니 이래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손꼽히는 미켈란젤리는 1920년 1월 5일,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의 옛도시 브레시아(Brescia)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유고슬라비아인이고, 부친은 변호사였으나 피아노 교사의 자격을 가졌으며, 미켈란젤리도 4세 무렵부터 아버지로 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브레시아 벤투리 음악원에서 배웠다.
처음에는 바이올린과 오르간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가 피아노로 전공을 바꾸었다.
10세 때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하여, 3년에 걸쳐 조반니 안포시(Giovanni Anfossi, 1864–1946)에게 피아노를 사사했다.
이때서야 비로소 정규 음악교육을 빋을 수 있었으며, 14세에 무척 빨리 졸업을 하였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미켈란젤리는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힘든 예술가의 길을 걷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는 없었다.
이즈음 아버지로부터 의학을 공부하라는 권유를 받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학공부에 매진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38년 5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국제 콩쿨(the Ysaÿe International Festival. 훗날 퀸 엘리자베스 콩쿨이 된다)'에 출전, 7위에 입상하면서 부터이다.
당시 1위가 에밀 길렐스(Emil Gilels, 1916-1985), 2위가 모우라 림파니(Moura Lympany, 1916-2005)였으며, 이때 심사위원 중에 폴란드의 거장 아르투르 루빈슈타인(Artur Rubinstein, 1887-1982)이 있었다.
루빈슈타인에 따르면 미켈란젤리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연주를 들려줬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기교는 완벽에 가까웠다고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39년, 19세의 나이로 제 1 회 '제네바 국제콩쿠르(the Geneva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에 참가하여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여 우승하였으며, 이 때 심사원이던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 1877-1962)가 그 뛰어난 연주를 '새로운 리스트의 탄생' 이라고 격찬한 것은 지금도 유명하다.
바로 제네바 콩쿨에서 1위를 함으로서 미켈란젤리는 자신의 인생을 음악에 바치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곧 제 2차 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활동은 이탈리아와 독일에 제한되어, 미켈란젤리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퍼진 것은 전후인 46년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에 연주 여행하여 센세이셔널한 성공을 거두면서부터였다.
진정한 테크니션이라 불릴 만한 미켈란젤리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946년부터는 세계 각지를 공연하며 자신의 이름을 더욱 널리 알렸다.
그러나 약 10년 후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한때 연주활동에서 떠나, 보르짜노에 틀어박혀 교사로있는 한편, 시골 사람과 같은 생활을 계속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59년에 다시 연주 활동을 시작하여 유럽은 물론 미국에도 연주 여행하여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또 교육에도 매우 열성이어서, 볼로냐, 베네치아, 토리노 등의 각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고, 개인적으로도 많은 젊은 피아니스트를 육성하여 위대한 교사로서도 알려져 있다.
또 1965년부터는 출생지인 브레시아에서 그의 이름을 붙인 피아노 음악제가 열리고 있다.
1950년대 30대에 접어든 미켈란젤리는 병환이 잦아 한때 복귀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도 했으나, 1955년 '쇼팽 콩쿠르'의 심사 위원 및 공식 피아니스트로 선정되며 미켈란젤리는 부활하였다.
이후 그는 세계 각지에서 콘서트를 열었고, 그 압도적인 테크닉과 비교할 수없는 아름다운 피아노의 음색으로 순식간에 명성을 확립했다.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도 배출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두 명이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 1942- )와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 1941- )로 모두 '쇼팽 콩쿠르' 우승자이다.
미켈란젤리는 기분이 나지 않으면 가르치지 않았고, 또 제자로 삼으면 몇 년이라도 무료로 가르치고 생활의 뒷바라지도 해줬다고 한다.
미켈란젤리는 공연 취소로도 악명이 높았으며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취소하곤 했는데, 1년에 실제로 열린 연주회가 열 번도 안 되는 해도 있었다 한다.
그럴수록 희소가치는 더욱 높아져서 미켈란젤리의 무대는 전설이 되어갔다.
그는 녹음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다행히 1970년대 도이치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 레이블에서 쇼팽, 드뷔시, 베토벤, 모차르트 <협주곡> 실황 등을 발표했다.
1988년, 미켈란젤리는 연주회 도중 심장 마비로 쓰러지졌고, 이듬해 1989년 복귀했지만 병의 후유증 때문인지 완벽한 연주에서 좀 변해서 느긋한 연주 스타일로 변모했다.
미켈란젤리는 악기 선택에 까다로웠다.
피아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예정됐던 프로그램을 모두 연주하지 않는다든지, 나머지 투어를 취소해버리곤 했다.
악기의 상태, 무대의 습도에도 예민하고 까다롭게 반응했다.
이러한 예민하고 까다로운 체로 걸러 미켈란젤리가 만들어 내는 음색과 소리는 투명하고 아름답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늘어서 떨리는 듯도 한 피아니시모에서부터 압도적인 포르티시모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진폭의 표현을 구사하였다.
그 하나하나는 감각적으로 연마된 세련된 면모를 보여준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와 달리 건반의 상단 잡음, 즉 손가락이 건반에 부딪칠 때 나오는 충돌음을 최대한 억제해서 내는 것이 미켈란젤리 특유의 피아니즘으로 알려져 있다.
템포나 아고긱(Agogic: 템포에 미묘한 변화를 주는 주법)도 그의 특징이었지만, 이렇게 손톱 소리 안 나는 연주는 과거 선배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페루치오 부조니(Ferruccio Busoni, 1866-1924)와 연결되는 점이다.
미켈란젤리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열네 살 때 졸업시험을 보고 학위를 받을 때 연주한 곡이 브람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었다.
고난도 작품을 청소년기에 장기로 삼았다.
위에 언급한 공연 취소에 대해 본인이 해명한 부분도 있는데, 미켈란젤리 연주료가 보통 피아니스트보다 비쌌다.
돈을 많이 받고 연주하는데, 부족한 연주를 해버리면 관객들에게 미안해서 안 된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는 표면적 이유였을 뿐이고 팔 부상으로 컨디션이 자주 저하됐기 때문이란 분석이 있다.
최전성기의 미켈란젤리는 무서우리만큼 실수 없는 완벽한 연주로 유명했으며, 조율사도 항상 동행했다.
도이치그라모폰의 유명한 쇼팽 녹음은 음반 한 장 녹음을 3시간 만에 끝냈는데, 그만큼 실수 없는 연주를 했다는 얘기다.
연주만 3시간이지 준비 과정은 오래 걸렸으며, 피아노가 만족할 만한 상태가 될 때까지 편집증에 가까울 만큼 집착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 만큼 완벽한 연주를 위한 준비는 그야말로 철저했던 미켈란젤리였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리는 연주를 위한 컨디션 만들기 위한 집착도 유명하지만 초인적인 감각의 소유자였다.
이런 일이 있었다.
미켈란젤리가 피아노를 치다가 건반 하나가 이상하다고 계속 주장했으나, 조율사는 이상을 찾지 못했다.
이에 미켈란젤리는 피아노를 완전히 분해해서 검사한 결과, 그 건반에만 있는 작은 기구가 거꾸로 설치돼 있었다고 한다.
좌우가 98퍼센트 정도 대칭인 기구였는데, 거꾸로 설치해도 아무도 모르는 것을 미켈란젤리가 잡아냈다는 얘기다.
음반으로 전곡이 남아있지 않지만 연주회에서 서른 두 곡의 베토벤 <피아노소나타>를 연주했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리는 <협주곡>을 할 때 오케스트라 연주자들과도 직접 소통을 하면서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은 녹음도 훌륭하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베토벤 협주곡 1번>, <3번>, <5번 "황제">를 녹음했다.
이게 원래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예정됐었던 녹음이었다 한다.
클라이버는 함부르크에서 미켈란젤리와 <5번 "황제">를 공연하고 베를린에서 녹음을 시작했는데, 악보에 표시된 수많은 지시들을 보고 미켈란젤리가 그 해석에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 표시는 피아니스트가 아닌 악단원들한테 지시하는 사항이었으며, 의욕을 잃은 클라이버는 이 녹음을 접었다.
미켈란젤리가 조율을 못한 채 연주한 날도 있었다.
카네기홀 공연 당일, 미켈란젤리는 공연시간이 다 됐는데도 리허설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날은 특히 피아노에 줄을 갈아맸기 때문에 조율이 반드시 필요했었다.
조율사가 30분만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는데도 “나는 연습해야 한다”고 피아노에만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다음날 신문 리뷰에는 “피아노 상태가 엉망이었다”고 나왔다.
그토록 까다로운 미켈란젤리도 집에서는 연습에 푹 빠져 조율을 하지 않은채로 연주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미켈란젤리의 레퍼토리 폭은 좁은 편이었으며, 새로운 곡을 레퍼토리에 추가할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마디 동기만 계속 연습하곤 했다고 한다.
그가 가르친 제자들에 따르면 미켈란젤리가 자신들에게 가르친 곡들은 전곡을 모두 연주해 보였다고 한다.
즉, 완전히 마스터한 곡들만 제자들에게 가르쳤단 얘기다.
미켈란젤리는 지휘자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칭찬했던 몇 안 되는 연주자 중 하나였다.
첼리비다케는 독설가로 유명했다.
카라얀을 ...“유능한 비즈니스맨이거나 아니면 귀가 안 들리는 인간”...이라고 했으며, 리카르도 무티는 ...“재능은 있으나 지나치게 무식”...하다고 깎아 내렸다.
그리고 아바도에게는 ...“아주 무능한 사나이다.
3주 동안 굶고도 견딜 수 있지만 3시간 계속하여 아바도의 연주를 들으면 심근경색이 생긴다”...고도 했다.
칼 뵘은 ...“감자 포대”...이고
토스카니니는 ...“완벽한 음표공장”....이며
번스타인은 ...“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무시해 버렸다.
그런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거의 유일한 "천재"라고 칭찬했던 존재가 바로 미켈란젤리였다.
개성적인 두 사람의 앙상블이 좋아 각지에서 공연을 반복했다.
1980년 일본에 피아노를 반입하다가 압수당한 뒤에 적대감을 느꼈던 미켈란젤리는 협연 때 뮌헨 필의 일본인 단원 세 명을 빼달라고 요구했다.
첼리비다케는 이 제의를 거절했고 둘 사이는 멀어졌다.
미켈란젤리는 역시 비슷하게 까탈스런 글렌 굴드에게 동질감을 느꼈다고 한다.
카레이서답게 페라리와 벤츠 등 차를 과속으로 몬 것도 유명하다.
보통 180킬로미터, 밟을 때는 260킬로미터로 달리며 죽음과의 경계선이 희박해진다고 느껴질 때까지 달렸다고 한다.
아무튼 미켈란젤리는 현대 피아노 미학의 극치로 평가받는다.
베토벤에서 잘 연마된 표현력과 그 내적 긴장의 지속력이라든지 드뷔시 연주에서 음 색채의 아름다움과 음의 시라고 해도 좋을 정교하고, 판타스틱한 세계 등은 놀랍다.
드뷔시의 피아노에 몰입하기 힘들었다면 미켈란젤리를 들어보라.
조금씩 문이 열리는 걸 느끼게 된다.










'오늘의 음악 > 클라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비쉬 : Debussy: Préludes, Book 2, CD 131 드비쉬 피아노 곡 어린이 코너 A .Michelangeli (4) | 2025.05.11 |
---|---|
무소륵스키: 전시회에서의 사진 & 스트라빈스키: 세 가지 의 악장무소륵스키: 전시회에서의 사진 & 스트라빈스키: 세 가지 의 악장 (7) | 2025.05.10 |
쇤베르크 / 피아노 모음곡 (Suite für Klavier) Op.25) (0) | 2025.05.09 |
바르토크 연기 : 졸탄 코시스, 2 Kocsis Plays Bartok (0) | 2025.05.09 |
바르토크 연기 : 졸탄 코시스, 1 Kocsis Plays Bartok (1) | 2025.05.08 |